'인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6/12/17 인연 (6)
  2. 2006/10/20 호주에서 온 편지

<신년운세 : 인연의 한 해가 되리니 배필을 만나지 않으면 평생을 좋은 동반자로 보낼 인연을 만날 수 있음이라>

인연이라 믿었던 사람들과의 만남은 대개 뽑기처럼 다가오는 법이다. 아아, 고작 뽑기라니, 하고 실망하는 당신. 연말, 더구나 눈 내리는 밤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낭만적인 표현이 아니라서 미안하다. 하지만 더욱 낭만적이지 않은 사실이 아직 남았다 - 난 뽑기운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라는 거다. 세상엔 참 그럴듯한 사람들이 많다(물론, 그 중엔 나도 들어간다는 걸 스스로 부인할만큼 뻔뻔한 사람은 아니니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 어쩌면 그럴듯한 사람은 또한 그럴듯한 사람과 필연적으로 만나도록, 태초부터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져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참 낭만적이지 못한 인생이다. 이봐 거기, 그렇다고 너무 눈에 띄게 실망하진 말아. 가장 낭만에 굶주려 있는건 다름아닌 나라구.

뭐 이쯤되면 고백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쉽사리 짐작할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내 몫의 뽑기는 뚜껑을 열어보면 언제나 꽝, 이었다. 그럴'듯해' 보인다는 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이럴 때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지금 손에 있는 것을 될수 있는 한 빨리, 그리고 '쿨하게' 버려버리고 다음에 올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늘 그렇듯이 언제나 그렇게 쿨해질 수 있는 건 아니다. 가끔은 결과를 확인하고도 미련이 남아 차마 놓질 못하고 있다가 크게 데이기도 한다. 물론 상처받고 나서도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단지 종이에 손을 베거나 책상 모서리에 무릎을 부딪힌 정도의 것일 뿐이라고 툭툭 털고 일어날 수만 있다면 정말로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사람에 데인 상처는 오래 간다. 상대가 아무리 그럴'듯한' 사람이었다 해도 말이지.

그래. 찌질하다고 비웃어도 좋아. 찌질이란 이름을 뒤집어 쓸 각오를 하고 더욱 솔직히 말하면 난 두어 시간 전 부터 지금까지, 그 데인 상처를 미처 어찌하지 못한 채로 예전에 만났던 - 그럴'듯했던' - 사람 중 한명의 소식을 접하기 위해 인터넷을 수시로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터였다. 미련이 남아서는 아니었다. 앉아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데 어쩌다 그냥 문득 그 사람이 생각난 것 뿐. 그래도, 그것 만으로도 이 행동에 착수할 충분한 근거는 되었다. 아무튼 몇 번의 집요한 접속과 치밀한 공작 끝에 나는 그 사람이 특정 인물과 아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는 정황근거를 포착하고야 말았다. 부아가 치밀었다. 뭐야, 나는 이렇게 찌질하게 살고 있는데, 넌 여전히 그럴'듯하게' 살고 있단 말이지. 제법인걸, 그 점은 칭찬해주지. 하지만 지금 만나는 사람은 아직 자기 몫의 뚜껑을 열어보진 않은 게로구나. 에그- 넌 그 사람이 불쌍하지도 않니.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생각보다 사람에 데인 상처는 오래 간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건 미련이 남아서는 아니다. 다만 아직 자기 몫을 채 확인하지도 못한 그 사람이 약간 불쌍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최소한, 평소에도 '그럴 듯 하지 않다'는 낌새를 팍팍 풍기고 다녀주면 좋을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그럴'듯한 척'을 멈출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좀 더 과장되고 거창하게 말하자면, 모든 것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하고 긍휼히 여기는 거룩한 인류애를 지금 나는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가장 가까운 공중전화로 향할 참이다. 아무래도 이 싸움은 장기전이 될 것 같다. 몇분 후, 눈 내리는 이 서울 하늘 아래 있는 어떤 사람은 익명의 전화를 한 통 받게 될 것이다. 부디 그 한통의 전화가 한 사람의 앞길을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아, 거기, 그렇게 노골적인 눈은 하지 말라니까. 나라고 이런 역할이 달가운 건 아니라구. 가장 낭만에 굶주려 있는건 다름아닌 나니까.



델리스파이스 - 인연

널 다시 만났었던 그때 네 곁엔 다른 사람이
난 얼굴을 붉힐 수 밖에 가벼운 악수도 없이

넌 지금 어디에 세월의 흔적에
묻혀버린거야 나만의 상상은 깨져버린거야

십년이 지나고 그 후로도 삼년이 또 지난후에
널 다시 만났었던 겨울 작고 어린 스위트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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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7 01:51 2006/12/17 01:51
fictions l 2006/12/17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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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15일 오전 9시 51분

한글 수업을 하고 나오는 길목에, 성희언니가 보낸 편지 한 장이 알림판에 붙여져 있었다. 성희언니는 지금 호주에 가 있다. 그냥 어학연수를 하는 게 아니라 여러가지 일도 하면서 연수를 하는 모양이다.
같은 남부교육센터 강학일 뿐 아니라 같은 반 선배이기도 한 성희언니는, 혹자의 말에 따르면 '너무 머리가 좋아 세상 모든 걱정을 그러모으는 사람'이다. 그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머리가 조금만 좋으면 자기 앞가림만 해도 되는데 말야. 그 사람은 머리가 너무 좋아. 그래서 자기 걱정만도 모자라 남 걱정까지 사서 하지. 그 말을 듣고보니 정말로 성희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걱정이 아예 없어지면야 가장 좋겠지만 만약에 걱정이란게 꼭 있어야만 하는거라면 언니는 이제 그만 언니 걱정만 좀 했으면 좋겠다.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언니는 지금 온전히 자기 생각만, 자기 걱정만 하고 있게 되었을까. 어쨌든 멀리서 보내 온 짤막한 엽서 한 장을 읽고 나서 괜시리 마음 한 구석이 뭉클하였다.

남부 사람들에게!
후원인 소식(e-mail로) 잘 받아보고 있습니다. 여전히 매일 수업과, 새로운 사람이 드나들고, 새 학기 준비로 달력이 빡빡할 만큼 많은 회의와 일들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구나 - 하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양털을 깎으러 간다며 법썩을 떨던 저는, 지금 호주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유명관광지'(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 에 나와 유명한) 에어즈록으로 가는 길목의 휴게소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원주민들한테 술팔고 치킨팔고, 관광객들한테 샌드위치 팔고, 밤에는 근처 카우보이들이랑 술마시면서 재미나게 지내고 있습니다. 아마 갈때까지 양털깎을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오늘은 쉬는 날이라, 우연히 묘한 인연으로 얻은 소주 한 팩을 놓고 너구리를 끓여 숟갈을 꽂아놓고 같이 일하는 그리스 아저씨한테 '우리'는 이렇게 숟갈 꽂아놓고 밤새마신다고, 갈비탕 곱창 삼겹살.. 그리고 매일 한 방에 앉아 정신놓을때까지 마셨던 이야기를 하니 - 매일 이웃들과 파티가 끊이지 않는 예전의 그리스와 똑같다며, 그런 '너네'는 아직 살만한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우리'들이 생각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뒤늦게 엽서 한장 보냅니다.

이번학기, 길었다면 길었을 호주생활을 마치고 성희언니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얀 피부가 조금은 검어지고 턱선 언저리에서 찰랑거리던 머리도 짧아져 있었다. 그리고 이번학기면 졸업을 한다고 했다. 입학할 때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던 사람이 한동안 내 곁에서 사라졌다가, 뭔가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나 다시금 나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참으로-묘한-기분이었다.

하지만 피부색이 달라지고 머리 길이가 짧아졌다고 해서 사람이 완전히 바뀌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오늘 또 학교를 오가다 만난 언니는 나에게 남부교육센터에서 강학활동을 했던 사람들끼리 동문회를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아주 조금이라도 센터에 도움이 되는 데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했다. 무언가, 조금이라도 함께 했던 나날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인연은 계속되고 사람과의 끈도 계속 이어지고, 우리는 그렇게 함께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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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0 18:52 2006/10/20 18:52
old diaries l 2006/10/20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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