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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06 잃어버린 우산 (6)
내가 거의 매일 들르는 웹진 매거진 t(www.magazinet.co.kr)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내 인생의 드라마'라는 제목의 칼럼이 업데이트된다.  매주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인생의 드라마'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어서 꾸준히 읽고 있는데, 그 칼럼을 읽으면서 과연 내 인생의 드라마는 무엇일까, 설마 그런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혹시나 매거진 t에서 내가 생각하는 '내 인생의 드라마'에 대해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해 오면 무엇에 대해서 써야하나 하고 생각하니 정작 어떤 드라마도 떠오르지 않아 참으로 이상타, 싶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남들한테 '드라마 오타쿠'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수많은 드라마 - 특히나 미국 범죄 수사물 드라마 - 를 섭렵하느라 부족한 수면 시간까지 쪼개써야 했을 정도인데 말이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이름만 대면 아, 그 드라마, 할 정도의 인기물도 아니었고 그나마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지 못하고 거의 극 전체의 4분의 3이 지나서야 보기 시작했던 MBC 베스트 극장의 '잃어버린 우산'이라는 단막극이었다. 이 글을 쓰기 전 오랜만에 한 번 볼까 싶어 홈페이지 다시보기 코너를 찾아 들어갔는데 방영일이 오래된데다 사람들 사이에서 가끔씩 회자될 만큼 신나거나 짜릿하거나 아니면 무지 슬프거나 한 내용도 아니어서 그 이름조차 목록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제목이나마 기억하는 것이 용타고 하겠는데 그것은 이 단막극 후반에 흐르는 우순실씨의 노래, '잃어버린 우산'덕분이었다.

A/S센터에서 수리 일을 하는 남자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바로 윗층에 이사온 한 여자 때문에 최근 바짝 신경이 곤두서 있다. 여자는 다짜고짜 남자가 자신의 우산을 가져갔다며 따지질 않나, 시도때도 없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대 그나마도 방음이 잘 되지 않는 낡은 아파트 밑층의 남자를 짜증나게 한다. 게다가 낮에는 무얼 하는지 계속 집에만 붙어있고 밤이 되어서야 옷을 차려입고 일터로 나가는 여자를 보며 필시 술집에라도 나가는 것이겠거니 지레짐작을 한다. 한편 여자는 아래층 남자의 오해와는 달리 실은 외국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나름 재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이 성악으로 먹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여자는 한국으로 돌아와 낡은 아파트에서 라이브카페 가수로 새 생활을 시작한다. 모든 가족이 미국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득부득 우겨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원래부터 유복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여자에게 이 생활이 만족스러울 리는 없고, 그렇다고 다시 가족들에게 돌아가기는 더더욱 싫은 마당에 아래층 남자까지 시도때도 없이 시비를 걸어오니 더더욱 자신의 처지가 비참해진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첫사랑이자 어린시절 우상이었던 같은 반 여자애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처음에 남자는 이 사실을 믿기 어려워 하는데, 그도 그럴것이 그 여자애는 부잣집 딸에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 우등생에, 남자애들이랑은 거의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도도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여자도 역시 남자가 자신과 같은 반이었던 남자애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한때는 잘 나갔던(?)' 자신의 현재 상황이 부끄럽게 여겨져 자신이 그 여자애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엔 자신이 그 여자아이라는 것을 남자에게 들키고 만다. 극의 말미에 모든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은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옛날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게 되는데, 남자는 현재 술을 마시며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여자의 얼굴이 어린 시절 자신의 첫사랑 여자애의 얼굴과 겹쳐지며 자신의 우상이었던 그 여자아이의 이미지가 산산조각이 남을 느낌과 동시에 지난 몇 달간 여자와 티격태격하며 저도 모르게 쌓여버린 미운정을 깨닫고는 착잡해진다. 한참동안 술병을 비우던 여자는 남자를 남겨두고 먼저 포장마차에서 떠나려는데 때마침 하늘에선 소나기가 내리고, 우산도 없이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던 여자의 뒷모습을 본 남자가 달려나가 우산을 씌워주며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이 단막극은 끝난다.

인생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나 콧날을 시큰거리게 만드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다룬 것은 아니었지만 잠시 스쳐지나가며 본 이 드라마가 여전히 내 머리속에 남아 있는 것은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여자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깔리던 나레이션 때문이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지금도 생각나는 그 대사, '예전에 나는 니가 갑자기 사고를 당해 몸을 못쓰게 되기라도 했으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너를 버리고 심지어는 니 가족들까지 너를 버리고 너를 혼자 남겨두고 미국으로 떠나버렸으면, 하고 생각했어. 그리고 혼자 남겨진 너에게 내가 찾아가 나만이 끝까지 너를 돌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랬었어...'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초등학생 남자애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라고 하기엔 좀 섬뜩하기까지 하다 싶긴 하지만 당시의 나는 짝사랑이라도 하고 있었던지 - 그리고 내 짝사랑은 대부분 상대에게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하고 끝나버리고 만다 - 그만큼 간절했던 그 남자애의 모습이 나도 모르게 떠올라 그 대사가 나에겐 퍽이나 감동적이었고 그래서 여자를 쫓아 우산을 들고 빗속으로 달려나가는 남자의 모습이 그 어느 드라마보다 해피한 해피엔딩으로 기억된다. 허나,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러브 스토리는 수도 없이 많았는데 하고 많은 드라마 중에 왜 나는 이 짧은 한편의 드라마를 내 인생의 드라마로 꼽았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그것은 아마 두 주인공의 평범함, 그리고 그 주인공들의 평범한 일상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다시 말해 그들의 러브스토리는 드라마 속의 이야기지만 '한편의 드라마 같지 않은' 이야기였던 것이다. 주변의 누구에게나, 심지어는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하지만 그 이야기의 당사자에게는 세상에 진배없는 가슴 따뜻하고 귀중한 기억일 그런 이야기. 그래서 이렇게 잊을만 하면 다시 생각나는 이 드라마의 한 장면을 곱씹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며 뜬금없이 아, 비나 좀 내려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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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6 00:37 2008/02/06 00:37
liking/tv dramas l 2008/02/06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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