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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읽은 책 중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엘리자벳 마셜 토마스의 『세상의 모든 딸들』이었다. 어느 겨울 날의 깊은 밤에, 엄마는 그 책을 읽고 있었고 나는 여느 때 처럼 엄마를 흉내내며 엄마 옆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엄마가 그리도 열심히 보고 있는 책이 궁금해 제목을 물었다. 그 때 엄마는 책 표지를 보여주며 내가 만일 좀 더 크고 어른이 되면, 꼭 읽어보라고 말해 주고 싶은 책이라고 했다.

그날 밤 이후 엄마의 권유대로 한 번 읽어보리라 싶어 그 책을 펼쳤다 덮었다 한 것이 어림잡아 다섯 번은 될 것이다. 허나 늘 몇 장 읽다가 그만두곤 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 책을 읽은 것은 공부하는 것만 빼고는 모든 것이 마냥 재미있던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어느날이었다. 이번엔 어찌어찌 해서 그 책들을 끝까지 읽었지만 왜 엄마가 나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예전에 엄마가 권했던 책을 지금에라도 다 읽었다는 성취감만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을 뿐, 솔직히 말해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 책은 언제나 내 가까이에 있었다. 몇 번 이사를 다니면서 우리는 이삿짐을 줄이기 위해 쓸모 없는 책들, 오래되고 낡은 책들을 버려야 했지만 그 책들(『세상의 모든 딸들』은 전 3권으로 되어 있다)만은 모서리가 이지러지고 종이가 누렇게 변색되었어도 꼭 가지고 다녀 현재 우리 집 책장 속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지금, 영화 '훌라 걸스'를 보면서, 나는 이제서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 겨울밤의 풍경들과 그 때의 엄마의 모습과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딸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검은 다이아몬드의 시대가 가고 폐광의 시대가 다가오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훌라 댄스를 시작한 광부의 딸들은, 그러나 절대로 그들의 삶은 비루하지 않았다. 엔딩 크레딧이 전부 올라가고 나서도 한참동안, 500명의 사람들이 하와이안 파라다이스에 고용되는 반면 1500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300여명의 훌라 댄서들이 무대에 오르는 동안 4000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은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여전히 그들의 춤은 빛나지 않는가, 하고 곱씹는다. 그야말로 그들은, 세상의 모든 '거룩한' 딸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 겨울의 엄마와, 지금의 엄마와,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그러하듯이.

큰딸이 대학생이 되면, 남편이 퇴원만 하면, 시어머님 수술만 끝나면, 하고 자신의 백내장 수술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던 엄마는 내가 서울에 있던 몇년 전의 어느날 기어이 돋보기 안경을 새로 맞췄다고 했다. 검은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라, 이제는 자잘한 글씨가 찍힌 종이만 봐도 눈이 피곤하고 아파서 요즘은 책도 못 보겠다고 하시는 엄마의 모습은 낯설다. 그러나 그러한 낯설음과 이 한편의 영화 덕분에 나는 이제서야 비로소 한 때는 누군가의 딸들이었을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과, 그리고 그 어머니들의 딸들을 직시한다. 해서 변함없이 엄마는 나에게 있어서는 세상의 모든 딸들 중 가장 거룩한 한 명의 딸이다. 그리고 나는, 그 거룩한 한 명의 딸의 핏줄이며,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세상의 모든, 거룩한 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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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9 02:21 2007/03/29 02:21
liking/movies l 2007/03/29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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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ikeablue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게 어린시절 읽었던 <세상의 모든 딸들>은 그저 원시인 이야기로밖에 기억나지 않는고나. [나의 무식함이란..쩝;]

    2007/03/29 20:46
    • 飛정상 2007/03/30 1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옛날에 인류학과의 어떤 수업에서 세상의 모든 딸들을 읽고 그 부족의 가계도와 주거 생활 및 지형을 그려오라는 숙제를 낸 적 있대. 우리과도 그런 숙제 좀 내 줬으면 좋겠다. 가슴이 막 두근두근하면서 숙제하는 순간 내내 즐거울 것 같은데!

  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럴수가 이 영화 아직 걸려있는거야????

    2007/03/29 22:39
  3. 황옵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민욱 글은 언제 읽어도 좋아.

    2007/04/16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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