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저녁을 먹으면서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배달된 음식이 담겨져 있던 용기가 일회용이었기에 자연스레 화제는 환경보호운동으로 흘러갔는데, 어떤 이는 정말로 환경을 보호하려면 우선 인간이 지구에서 없어져야 한다는 극단적이고, 한 편으로는 농담같기도 한 이야기를 꺼냈고 어떤 이는 식사를 하는 때 마다 죄책감을 느끼는 이를 한 명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환경 보호에 대해 별 관심이 없으며 일신의 안녕과 편리를 제 일의 가치로 삼는 나는 그 두 사람의 이야기 모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임과 동시에, 한편으로 이렇게나 스스로를 싫어하고 스스로를 비판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 대한 애착을 떨쳐버릴 수 없는 종(種)은 아마 이 지구상에 인간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만이, 이 <란포지옥>과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리라는 생각도.
그리하여 이것은 어떤 영화인고- 하면, 작년 일본 인디필름 페스티벌이 한창일 당시 무척이나 보고 싶어 목을 빼고 기다렸던 작품이었지만, 막상 보고나니 바나나우유를 700개쯤 사 주면서 같이 보자고 굽신거린다면 또 모를까, 단순히 아무런 정보나 각오 없이 다른 사람과 이걸 보자고 우겨댔으면 큰일났겠다 싶은 생각이 덜컥 드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에도가와 란포의 원작을 탐독했고 나름 이런 장르에 면역에 되어 있다고 생각한 나 자신조차도 몇 번이나 중간에 보기를 그만둘까 망설였던 작품이니까. 그러나 이 혐오스러운(!) 옴니버스 영화는 막상 볼 때는 괴롭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다시금 장면 장면들을 곱씹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일단은 나 자신부터가 이 영화가 주는 알 수 없는 오묘한 느낌을 이틀째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란포의 원작을 뛰어넘는, 영화가 뿜어내는 기괴한 분위기나 충격적인 영상때문만은 아니다(차라리 그런 영상들만을 실컷 보고자 한다면 스너프 필름이나 포르노 영화를 찾아보시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지독히도 스스로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그러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애착을 떨쳐버릴 수 없는 인간만이 만들 수 있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영화의 사건들은 모두, "아름답게 부를 때는 '꿈'이고 '사랑'이지만 더럽게 부를 때는 '욕망'이고 '정욕'"인 것들, 오로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에 모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물론 영화 속의 일들은 모두 일상의 범주에는 벗어나 있지만, 스스로가 한 번이라도 그와 비슷한 것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맥락의 감정들을 느끼지 않았으며 그와 비슷한 이들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라고 장담하지는 못할 것들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더럽고 증오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한 그것을 완벽히 부인할 수는 없는 것들, 혹은 스스로가 긍정하고자 노력한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로부터 받아들여지기는 힘든 것들, 그래서 더욱 우리를 괴롭히는 그런 것들. 때문에 이 영화를 잘 만든 작품, 명작으로 말하기도 어렵지만, 그와 동시에 단순히 이 영화를 혐오스럽고 기분 나쁘다 여겨 다시는 입에도 담지 못할 것으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어쨌거나 이 '문제작'을 보면서 건진 최대의 수확은 일본 배우 아사노 타다노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다음주 쯤에 느긋하게 감상해볼까 싶어 챙겨두었던 영화 '녹차의 맛'에도 이 배우가 출연한다고 한다. 최근 본 영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의 여주인공 나카타니 미키와 함께 또 한명, 주목하고 싶은 배우가 생겨서 꽤나 즐겁다.
TAG 영화 란포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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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우유라... - _-
2007/05/06 19:02누구씨 들으라고 한 소리는 절대로 아니네요, 뭐.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어도, 솔깃할 만도 했어.(흐음)
무려 700개라니.......
하지만 자라보고 놀란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말이지.. 응;
아, 아냐아냐. 난 이제 친절한 사람이니까 그만 놀리겠어!
저는 마지막 크레딧이 뜨는 노래 가사를 보면서, 이건 감독들이 스스로의 유년기에 가졌던 고약한 상상들을 가감없이 영화로 표현했다는 느낌이었는데. 란포를 읽으면서 자란 비뚤어진 중년들의 유년기 회상이랄까요.
2007/05/07 00:14저 역시나 사실 괴기스러운 분위기의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어릴때부터 그런 걸 거리낌없이 읽으면서 자라났어요. 하지만 영화는 원작보다 조금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에도가와 란포가 이 영화를 봤으면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네요.